나의 이야기

[스크랩] 안면도 외 8편/ 탁영완

소하,연담 2014. 2. 9. 16:56

 

 

 

안면도安眠島 외 8편

 

 

                탁영완

 

 

섬의 소소한 팔베개를 떠올려 본다

그를 떠올리기만 했는데 까마득하던 불면이 찾아왔다

어쩌면 그는 나의 불면의 팔베개일까

소소히 잠이 올 것 같은 팔베개가 사실

얼마나 불편한 불면의 목침이던가

그의 곁에서 한 번도 깊이 잠들어 본 적이 없다

팔을 놓아버리면 생각이 머릿속에서 팔을 뻗고

안았던 가슴을 풀어도 풀지 못하고 밤새 품고 있는

생각의 녹조류 가슴

어쩌면 나는 잠들기 위해 그를 떠났는지도 모른다

그는 늘 섬으로 초연히 잠들고

나는 흐느적 흔들리며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을 깔고 잠든 그는 작은 섬이다

외로움의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그는 그렇게 엎쳐서 잠드는 섬이다

편안한 잠 속에서 섬 하나 도드라진다

섬을 팔베개하고 온전히 잠들지 못하는 밤의 하얀 속눈썹

나는 지금 안면도에 와 있다

 

 

 

를 건너다

 

 

삼 년 걸쳐 새긴 문신

삼십 년 불꽃으로 탄다

지키고 선 전신주 키 큰 기다림이 탄다

따개비처럼 바위에 엎딘 안타까움이 탄다

압축된 기억은 쉽게 재가 되지 않고

서로의 몸 끝까지 가보지 못한 미련 붙들고 탄다

또박또박 새긴 진실의 속살 터져

천 개의 몸이 열린다

 

몸속에는 불어버린 강이 보이고

긋지 않는 소나기가 보이고

떨어진 꽃잎 자국이 보인다

삶을 함께 걸어보지 못한 청춘의 신발이 있고

녹지 않고 쌓이는 나라의 시린 손이 있다

 

젖어서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세상으로 가보지 않은 신발 이제 맞지 않아

몸에 가두어져 묶였다

 

삼십 년이 지나고야

우리 몸 한번 들여다보자

눈부시구나 하얀 문신

처음이듯 펼쳐진 천 개의 몸,

비로소 숨 쉬고 비로소 불탄다

 

재가 되어 다시 강으로, 다 잊고 흐를 수 있겠다

이제사 너를 탈없이 건너가겠다

 

 

 

혼자 놀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이 제 혼자

몸 바꾸어 가며 놀다 간다

 

햇살도 유리창 빗겨 미끄럼 타다

깊숙한 집안에 들어보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간다

 

늘 혼자

제 안에 금강석 갈아내는 빛의 예각이 되어

깊은 허공 자유자재 헤엄쳐 노는 이여

수많은 빛 제 안 깊이 반사된 보석 한 알이듯

신비롭구나

 

나 언제 심심 가운데 빛 들어

제 그림자 지우며 놀 수 있을까

 

햇살 닿지 않은 방구석

무심의 먼지를 본다

 

 

 

내가 피운

 

 

몸속에 쉴 수 있는 집을 가져봐

내가 피운 꽃을 내가 본다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시간만큼은

내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

 

참으로 쉴 곳은 그곳밖에

내 몸을 내가 느끼는 순간

나는 내 몸의 주인

내가 피운 꽃을 내가 본다

 

마음이 너를 끌어 당긴다

마음따라 흐르는 피

피 따라 열리는 기氣

기운 따라 피는 꽃

 

눈에 보이네

마음에 보이네

 

내가 피운 꽃으로 환해진

몸속의 집

 

 

 

피붙이

   - 아가 2

 

 

비로소 네 가슴이 이토록 아름답구니

 

꽃봉오리이다가 능금이다가 샘물로 열리는

푸른 핏줄이 뽀얀 젖줄 감싸고 처음 젖 물리는 날

작은 생명이 울어쌓는데

핑그르르, 삼십 년도 전 내 젖가슴이 멍울져 아파온다

 

아픔을 물려 피가 배는데

비로소 네가 불어 완성되는구나

 

꽃이 피고 과일이 열리고 씨앗 여물어

내 젖꼭지가 이제 익어 떨어진다

 

내 아기였던 딸아

네가 처음 아가에게 젖을 물리는 날

핑그르르 아픔을 타고

비로소 내 가슴으로 피가 흐르는구나

 

 

 

 

차차 이 되어가고 있다 2

 

 

  늘 혼자예요라고 돌 하나가 말했다 까마득한 옛날 잊고 있었던 섬, 가슴 작은 섬이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늘 입 다물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던 돌이었단다 안으로 말을 가두고 갇힌 말들은 굳어서 어쩌면 잿빛 돌섬 이미 그때부터 쌓고 있었는지 몰라 모두 내게 냉담해요라고 또 돌 하나가 말했다 내 안의 말들이 모두 일어섰다 외롭고 추웠던 내 어린 차돌을 품었다 섬은 섬의 말없는 입과 소외로 깎아낸 이마를 본다 내 안의 조약돌을 쓰담고 또 쓰다듬는다 나는 차차 섬이 되어가고 있다 뭍으로 한창 꽃잎을 벌려와도 두터운 옷을 껴입고 바람을 만난다 그리고 빛 들지 않는 섬 아이들을 매일 만난다 응달에 웅크리고 있는 내 안의 아이를 입히고 또 입힌다 어쩌면 가슴 작은 유년의 섬에서 詩人의 시린 고독과 詩의 말들이 씻기어 살아왔는지 몰라

 

 

 

을숙도

 

 

잊으라 한다

강은 잊으라 한다

시간의 강을 뒤채는

기억의 새떼

 

을숙도

둥지 버리고

강으로 수몰되는 갈대

무릎마다 꺾는 소리, 소리를

훌훌 잊고 떠나라 한다

 

남아 있는 자 외로움

바람의 몫이라 했지

마지막 떠나는 시선 하나 지키는

발목시린 버팀목

여윈 고집

 

섞이라 한다

강은 따짐도 없이 섞이라 한다

네 살과 멈춰진 영혼

범람의 피조차 비 적시면

시로 남는 은유의 새 몇 마리,

마음으로 보고

뼈마디 침묵으로 견디라 한다

 

바람은 다시

아름다운 말로 여린 살성에 닿아

꿈으로 번져 떨고

전설의 숲으로 모여

물새의 염원 강으로 푼다

간절한 하늘 뜻 그대로 일어선 가교

아득한 산 가까이 가라고 한다

 

하늘인 듯

바다인 듯 가라앉았다

구원처럼 얽어매는 빛

수심의 깊이로 전해오는 생의 질량,

강은 그렇게 머물라 한다

비의 업보로

끈 물지 못하는 배,

무채색으로 잠재운 물기 고여

저물녘, 더욱 빛 고운

슬픔 같은 은혜라 한다

 

 

 

어린왕자의 꽃나무와 시

 

 

빛이며

연한 눈물이며

노을 풍경으로 떨리는 눈시울,

사랑이라 하자

 

그 중 손닿은 수 없는 사랑,

별이라 하자

별 하나 품은 가슴, 꽃이라 하자

 

그 꽃을 위해 쏟는 성실한 감동

제 색깔 골라 오래 설레며 피는

어느 것과도 다른 꽃

그 꽃이 가진 향그런 비밀은

어린왕자 작은 꽃나무

 

깊은 우물 길어 올리는 도르레 소리

수만 개 작은 방울의 하얀 웃음을

우리 꿈이라 부른다면,

밤마다 물기 어린 안개로 젖는 꿈

그 맨살의 감촉을 훔친 죄를 뭐라고 할까

 

 

 

나비를 생각하다

 

 

자다가 문득 깨어나 나비를 생각하다

 

나비는 지금 어떻게 잠들었을까

아직 숭한 벌레로 색의 이파리에

구멍이나 내고 있는 나는

오랫동안 못 본 나비의 안부가 궁금해

스탠드를 밝히고 시를 읽는다

 

이른 새벽에 깨어있을

나비의 파닥임을 그리며

아직 펼쳐 보지 못한

너의 페이지를 뒤적인다

 

가장 편한 나래옷만으로 살풋

힘들어 가지 앉은

그대 유연한 힘을 찾아서

 

 

- 탁영완 시선집 『녹색광선』(두손컴, 2011)

 

 

 

 

* 탁영완 : 1948년 경남 진주 출생. 1986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하늘 향한 감각의 비늘>, <신을 만들며 또 지우며>,<사막의 말>, <인연의 자유를 위한>, <차차 섬이 되어가고있다>,<또 다른말 배우고 있었네>, <보로메군도를 떠돌던 안개>, <타클라마칸사막의 사랑>, <너를 건너다> 등과 시선집 <녹색광선>이 있음. 부산여성문학상, 부산문학상, 설송문학상, 한국현대시인상 등 수상.

출처 : The poet`s Garden
글쓴이 : 고드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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